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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연인들

#、살다

by 꽃띠 2012. 5. 1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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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의 봄과 몇번의 여름 그리고 몇번의 겨울.

한 사람을 만나 몇번의 계절을 보내다보면, 그 사람이 자연스럽게 나의 풍경이되고 배경이되고, 나의 습관이 됨을 느낀다.

 

내가 어떤 커피를 마시는지,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어떤 화장품을 쓰는지 줄줄이 알고있는 그를 위해 굳이 무언가 설명해야할 필요성을, 굳이 화려하게 꾸민 모습을 보여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와 함께있는 물리적인 시간 1시간은 심리적으로도 1시간. 째깍째깍. 1시간이 1분처럼 지나가는건 아니지만, 1분이 1시간 같은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이 지겨워 졌거나, 질리거나, 싫어진게 아니라 그냥 그는 그.

그는 내 남자. 나는 곧 그. 그는 곧 나가 된 것이다.

 

뻔-한 그의 행동반경. 다른 여자를 만날 것이라는 의심도 없다.

다른 여자가 그를 쳐다본다는 긴장감도 없다. 그는 곧 나. 나는 곧 그 이기 때문에.

 

겨울엔 카페라떼. 여름엔 요거트 음료. 보통은 아메리카노.

자주가는 커피숍 이지만 주문할 필요도 없다. 그는 안다 내가 어떤 커피를 마실지.

봄엔 분홍색 립스틱을, 가을엔 오렌지 립스틱을 사야한다는걸 안다.

피부가 건조해서 수분크림이 4계절 내내 필요하다는것을 알고 이쯤 되면 스킨 로션이 떨어졌다는걸 안다.

화장품 병의 바닥이 드러날때쯤 용케도 새 화장품이 나에게 온다.

그는 아니까. 내가 필요한 것을.

 

100일. 서로 축하했다. 우와. 100일이나 우리가 함께 지냈다니.

앞으로 더 사랑하자. 내가 더 잘할께. 작고 반짝이는 선물과 달콤한 말들이 오간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200일. 고마워. 내 옆에 있어줘서. 그동안 고생했지 못난 나때문에.

이제 싸우지 말자. 더 사랑하자. 100일보다 많은 다짐과 약속이 오간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300일. 100일땐 뭐했더라 200일엔 뭐했지. 300일은 좀 더 특별해야 할 텐데.

갖고 싶은거 있어? 먹고 싶은건? 뭐하지. 에이, 뭘 하면 어때. 다 좋아. 괜찮지? 나도 괜찮아.

그의 취향에 딱 맞는 선물과 데이트. 물론 나도 좋다. 그의 취향이 곧 내 취향이니까.

사랑한다 사랑한다.

 

1주년, 400일, 2주년, 3주년..

100일 단위의 기념일이 1년 단위가 되어간다.

평소 데이트보다 조금 더 꾸미고 나가지만 사실 더 특별할것은 없다. 이미 우린 많은 것을 공유했고 많은 공간에서 함께 숨을 쉬었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것은 별로 없다. 적어도 우리가 하고싶은 것들에 한해서는.

 

옆에서 손 잡아주던 그의 온기가 나의 체온이되고, 그의 향기가 내게 공기가 될때쯤 그 안락함 속에 지루함이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다.

조금 뜨거웠던 온도는 미지근해 진다. 나쁘진 않다. 뜨거운것보단 미지근한 것이 편하니까.

 

이 미지근한 공기는 어떠한 향기도 없이 그냥 그렇게 나의 일부가 되어간다.

 

주말을 반드시 함께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가 바쁘거나 내가 바쁘거나 혹은 둘다일 수 있다. 아쉬움은 없다. 다음주에 보면 되니까.

어쩌면 다음주도 그 다음주도 바쁠지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그 그 그 다음주가 있으니까.

 

오래된 연인.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아는 사이. 뭘 좋아할까 고민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것을 해도 그의 취향에 딱 맞출 수 있는 사이. 우리 나중에 이것 해보자- 약속할 것 보다 함께 해온것이 많은 사이.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그래.. 생각해보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없을 것이다.

이미 나는 나에게 너무 꼭 맞는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버려서 이렇게 꼭 맞기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를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커피를 마시는지, 내가 기분 나쁠땐 어떻게 해야하는지.

내가 화를내면 변명을 해야하는지 입을 다물어야하는지 .. 가나다부터 어떻게 설명하나- 막막하기 때문에.

 

오래된 연인.

너무도 당연한 연애의 시간동안 그들이 가장 중요한걸 잊어간다.

 

헤어지자. 이 한마디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이 관계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이 관계가

얼마나 가볍고 속절없이 .. 그 한 마디로 깨질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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