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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어디에서 구할까/장석주/산문집

#、읽고 쓰다

by 꽃띠 2017. 7. 1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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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어디에서 구할까 / 장성주

 

시인의 문장을 좋아한다. 울림이 깊은 단어, 엑기스만 모아 놓은 듯한 간결한 문장.

 

오랜만에 다시 집어든 책 '도마뱀은...'은 시인 장석주님의 산문집이다.

요즘 나는 일명 '책장 파먹기' 중인데, 몇장 깨작대다 책장에 묵혀둔 책들을 하나 둘 꺼내 읽고 있다.

새책 구매는 그만하고 가지고 있는 책을 되짚어 읽자-라는 의미였는데

내가 올해 결심한 일중 가장 보람있는 일로 남을듯 싶다.

다시 만나는 문장들이 반갑고 좋다.

 

이미 여러 시로 유명한 시인이지만, 내가 장석주 시인을 먼저 접한 것은 시가 아니라 이 산문집이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로 시작되는 시인의 대표작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알고는 있었으나,

그 시를 지은이가 장석주 시인이라는 것은 모른채 스쳐 지나갔으니

내가 시인을 알게 된 것은 '도마뱀...'이 처음인 것이다.

간결한 문장이 좋아 찾아보니 온라인엔 온통 대추 타령이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

 

작은 대추 한 알 익어가는 것 조차 세상 당연한게 없다는, 제 나름의 고군분투를 비웃지 않고 토닥여 주는 듯한

이 시 처럼, 시인의 산문은 따뜻하고 편안하다.

그래, 원래 클 땐 그렇게 아픈거야. 다들 그런거야. 엄살 떨지마- 라고 말하는 글들을 싫어하다 못해 경멸하는 나는

익어가는 대추 한 알에서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를 읽어내는 시인이 좋았다.

 

문장이 좋아지니 시인이 좋아지고, 시인이 좋아지니 그의 시선에도 정이 갔다.

내 생각과 같은 문장이 나오면 응원을 받는 기분이고, 내가 미쳐 생각지 못한 문장이 나오면

아, 이럴 수도 있구나-하며 감탄했다.

 

 

'반성은 자기 돌아봄이다. 어떤 진리나 옳은 신념이라 하더라도 반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것은 위험하다 ...

 반성과 회의가 없는 앎이나 신념은 재앙이다. 앎이나 신념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 당위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래야 부패하지 않는다' (23쪽)

 

작년쯤, 나의 화두는 정의였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에 정답이 있는가.

거기서 나아가자 생각은 '자기 철학이 없는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닿았다.

결국 옳은 신념을 가지려면 스스로의 철학이 단단해야 하고 스스로의 철학을 가지려면 끊임없는 자기 질문, 답을 찾는 고민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신념이 위험해 지지 않으려면 끝없는 자기 반성과 경청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책에서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나의 생각이 응원을 받는 것 같아 기뻤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방성이란 헛된 짓이다'는 시인의 문장 처럼, 끝없이 반성하고, 되묻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당신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생각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술/ 마셔 보니, 이것은 물의 불이다... 술은 환을 불러 온다. 그 환의 중심에서 의기양양해지고 잃어버렸던 '젊음'과 '자유'를 되찾는다. 물론 의식의 착종이 빚은 비극이다... 깨 보니, 숙취와 머리가 깨지는 두통, 괴물이었다가 아주 작은 재앙 덩어리로 위축된 자아가 있었다.' (18쪽)

 

괴물이었다가 아주 작은 재앙 덩어리로 위축된 자아라니..!

재앙 덩어리로 위축된 자아, 과음 후 내 스스로 마주한 나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문장을 이전에는 보지 못했다.

 

슬픈일이 있을 때는 술을 멀리하려고 노력한다. 우울감, 좌절감, 상처, 분노와 알코올이 만나면 반드시, 분명히 기필코

내 안에 있던 괴물이 세상 가장 추하고 못생기고 공격적이며 비열한 형태로 발현된다.

고상한척, 아닌척, 고운척 했던 낮의 나를 뭉개고 온 동네방네 존재감을 과시한다.

옆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물론이오, 사방팔방 전화선을 타고 옆에 없는 사람에게까지 등장을 알리더니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이후에는 SNS를 발판삼아 '일타다피'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설핏 잠이깬 새벽에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통화 목록을 확인하고 SNS를 확인하는 것은 정말

'재앙 덩어리로 위축된 자아' 그 자체다.

 

난해하고, 복잡해 보이는 제목과 달리 이 책은 간결한 문장들로 엮여있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 너머의 문장을 보는 재미, 시인과 함께 하이쿠를 읽는 재미까지 담겨있다.

근데 정말,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어디에서 구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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